떨어진 잎사귀 하나 하나를 찬찬히 보면 같은 단풍잎이라도 하나도 똑같은 게 없다. 개성을 지닌 이 많은 낙엽을 보며 우리의 삶과 대비해 본다. 각자의 애환이 다르듯이 생생한 낙엽, 벌레 먹은 것, 노란색, 빨간색, 아직 녹색 그대로 떨어져 뒹굴고 있는 잎사귀 등등 각기 다른 사연들을 지닌듯하다. 마치 인간의 지문처럼 참 다양한 낙엽들이 쓸어내면 어디선가 또다시 가을 산들바람에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 낙엽들도 모아 태우면 그 향기가 꽤 좋을 것 같은데 여기선 누구도 태우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안 된다는 시청의 조례 때문이리라...
단풍이 빨간색, 노란색, 갈색 등으로 변하는 이유는 잎의 액포 속에 들어있는 엽록소와 다른 색소 성분의 비율 때문이다. 밤이 길어지고 기온이 떨어지면 나무는 스스로 보호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때 잎과 나뭇가지 사이에 층을 만들어 영양분 공급을 차단한다. 이에 따라 녹색의 원천인 엽록소가 줄어들면서 그 속에 남아있던 색소의 종류에 따라 잎의 색상이 변하게 된다. 우리에게 가을 한 철 아름다운 단풍잎을 보여주고 그러다 땅에 떨어져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무도 줄기에서 잎을 떨어뜨려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고 매서운 바람의 영향을 줄여 추운 겨울에 스스로 대비한다. 춥고 긴 겨울 동안 목재의 밀도가 치밀하게 형성되어 단단해지기 때문인지 캐나다 단풍나무는 쓸모가 많다. 목재의 경도가 높아서 세계볼링협회에서 국제경기용 볼링장의 레인목으로 캐나다산 단풍나무를 쓰도록 유일하게 지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 수액으로는 메이플 시럽을 만들어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
촛불이 자신을 소진해 가면서 주위를 밝게 하는 것처럼 나뭇잎의 생애도 그야말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다. 봄부터 잎으로 햇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통하여 양분을 만들어 나무뿌리에까지 공급해 준다. 기온이 낮아지는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단풍으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다가 스스로 가지에서 떨어져 다른 나무를 위해 거름이 된다. 싱싱했던 초록과 화려했던 컬러의 기억도 땅속에 함께 묻히며…
우리의 삶도 여러 계절로 이루어진다. 혹시라도 땅에 떨어진 낙엽이라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새로운 봄을 위해 기꺼이 썩어 거름이 되어주는 가을 낙엽의 숭고한 의미를 깨우치도록 권하고 싶다. 가을은 결국 자기희생을 통해 새로운 준비를 하는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적인 즐거움을 주는 천연색 단풍의 화려함보다 땅 위에 나 뒹구는 초라한 낙엽 같지만 거름이 되어 차세대를 키우는 귀한 역할을 할 때 더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낙엽은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새 생명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다. 다른 나무뿌리에 보온작용을 해주고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쳔들의 가을은 화려한 단풍과 추수의 기쁨을 즐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 땅에 떨어진 낙엽이 다른 나무의 자양분이 되어주는 것처럼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준비와 결단의 계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뭇잎을 예수님의 생애와 비유하면 봄과 여름의 녹색 잎은 공생애 사역으로 볼 수 있다. 화려한 단풍은 마치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며 환호를 받는 마지막 장면 같고, 낙엽은 십자가의 희생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형형색색으로 외면을 자랑하는 단풍보다 타인을 위한 희생정신과 내면의 숭고한 가치가 더 중요함을 깨우쳐 주는 낙엽의 의미를 반추해 보며 이 가을에 또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고 있다.
빗자루 하나 달랑 들고 모처럼 낙엽을 치우다가 감사하게도 너무 깊은 뜻을 깨우치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 정취에 사색에 젖어 낙엽을 치우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나 보다. 벌써 해가 중천이다. 시장기가 든다. 문득 오늘 산책은 이걸로 대체할까?

게으른 생각이 드는 순간 영특한 코코가 벌써 목을 빼고 산책하러 나가자고 무언의 시위로 압력을 넣고 있다. 주인님만 애처롭게 쳐다보는 애완견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글 | 양경춘 *본 수필은 토론토 영락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웹진 "맥닛골 사람들"에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