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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 눈물의 기도

kenny Yang 2013. 10. 3. 01:17


양경춘(Kenny Yang)


 

‘로큰롤의 황제’ 그는 크리스천이었나?


   

엘비스 프레슬리가 크리스천이었나? 라는 친구의 질문에 바로 구글에 들어가 검색해 보니 38곡의 찬송가가 엘비스에 의해 불렸다고 뜬다. 42세로 단명했던 엘비스가 평생을 통해 복음성가 80곡 이상을 불렀다고 하니 ‘로큰롤 황제’로 불리는 그는 당시 수많은 찬송가의 가사를 통해 성경 말씀을 알았을 것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찬양을 부르고 가사를 알고 복음성가를 좋아한다고 저절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엘비스의 지인들을 따르면 그가 단순히 찬송을 알고 부른 것뿐 아니라 복음성가를 “사랑”했었노라 증언하고 있다.
콘서트를 마치고 늦은 밤 엘비스와 그의 친구들은 'In the Sweet By and By'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찬송가들을 즐겨 부르곤 했다고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엘비스 프레슬리는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모든 음악 잡지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인으로 올라 있으며 로큰롤의 탄생과 보급에 크게 공헌, ‘로큰롤 창시자’,’로큰롤 황제’라 불리고 있다. 1950년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를 로큰롤에 열광시키게 했으며 20세기 음악 역사상 최대의 논점을 불러일으켰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가난한 어린 시절부터 단번에 슈퍼스타까지 오르며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되었다. 엘비스의 음악은 초반, 어른들의 눈에는 차갑게 느껴졌고 '록은 젊은이들을 불건전하게 타락시킨다'고 생각하여 그의 음악을 금지하고 탄압운동을 전개해 나갔지만, 오히려 젊은 층 사이에는 더욱 붐이 확대해 나갔다. 이후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로큰롤'은 세계적인 메이저 화두로 자리 잡게 된다. 그 후 영국의 비틀즈가 미국에 등장하기 전까지 엘비스는 미국음악의 가장 중심에 군림하게 된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음악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음악을 듣게 했으며, 패션, 머리 모양까지 젊은이들에게 유행시켰다.

‘황제’를 탄생시킨 모자간의 생일선물 


   엘비스 프레슬리는 1935년 1월 8일 미시시피주의 한 작은 집에서 태어났다. 엘비스는 원래는 쌍둥이였지만 불행히 한 명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부친이 교도소를 들락거렸고 어머니가 재봉틀 일로 가계를 꾸려 나갔지만 지독한 가난 때문에 흑인 슬럼가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감이 없어 말을 더듬었고 ‘마마보이’란 이유로 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엘비스는 11세 생일 때 주변의 흑인 아이들처럼 권총을 선물 받고 싶어 했으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권총 대신 기타를 선물했다. 아들 손목을 잡고 주일마다 교회에 가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사랑을 담아 음악의 꿈을 선물한 것이다.
엘비스는 고교 졸업 뒤 낮에는 트럭을 몰며 돈을 벌고 밤에는 노래를 부르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1953년 여름 18세의 엘비스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거금(?) 4달러를 투자해서 멤피스의 선 레코드의 스튜디오에서 당시 인기 있던 발라드곡 'My Happiness'와 'That's When Your Heartaches Begin'을 녹음해 자신의 첫 번째 테이프를 만들었다. 이 생일선물이 후일 ‘로큰롤 황제’가 탄생하는 실마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음반사의 여직원이 엘비스의 이 노래를 듣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둔 다음, “좋은 발라드 가수. 꼭 붙잡을 것”이라고 메모했다. 이듬해 흑인 노래를 잘 부를 백인 가수를 찾을 때 이 메모를 본 레코드사 사장 샘 필립스는 그의 녹음을 듣고 엘비스의 재능을 직감, 1954년 6월 엘비스를 불러 노래를 직접 듣고 그를 가수로 키우기로 한다.
엘비스의 노래 “That's All Right(Mama)”가 멤피스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자마자 청취자들의 엽서와 전화가 폭주했다. 20세기 최고의 가수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엘비스는 1955년 11월 21일 RCA 레코드와 계약하게 된다. 엘비스는 TV쇼에 출현하여 흑인들의 리듬 앤 블루스(R & B)를 부르며 백인답지 않은 노래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당시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종교단체 등의 격렬한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엘비스의 공연을 본 젊은이들은 팬이 되어갔다. 1956년 1월 27일 데뷔앨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발매, ‘Heartbreak Hotel’과 ‘I was the one’를 공개했다. 이 싱글 앨범은 4월에 로큰롤 앨범 최초로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며 당시 많은 음악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6월에는 NBC Milton Berle Show에 출연해 '하운드 독(Hound Dog)'을 하체를 흔들며 불렀다. 엘비스는 처음에 'The Hillbilly Cat(시골 고양이)'이라는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해서 'Elvis the Pelvis(골반의 엘비스)'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설리번 쇼에 3번째 출연 당시 그의 노골적인 하체 춤으로 인해 초반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자 TV 방송에서는 상반신만 방송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엘비스는 플로리다의 연주에서 경찰관이 하체를 움직이면 체포하겠다는 협박으로 새끼손가락만 움직여 부르기도 했다.
엘비스는 한국에서는 발라드곡이 주로 알려져 있지만, 흑인음악을 백인의 영역에 끌어온 ‘혁명적 가수’였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 로커빌리(록과 컨트리 음악이 섞인 음악) 명예의 전당, 컨트리 뮤직 명예의 전당 그리고 2001년 복음성가음악(Gospel Music Hall of Fame) 명예의 전당 등 4개 분야에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인류역사상 유일무이한 가수이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솔로 아티스트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록 가수치고 엘비스의 영향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비틀스, 퀸,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이 엘비스의 영향하에 음악계에 입문했으며 심지어 밥 딜런도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 가수를 외치며 포부를 쌓았다. 저명한 록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ater Bangs)는 “우리가 엘비스에게 해준 동의를 앞으로 어떤 가수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

엘비스의 기록을 보면...


    미국 No.1 싱글 18곡(역대 2위)
영국 No.1 싱글 18곡 (역대 1위)
최다 골드, 플래티넘, 멀티 플래티넘 레코드 획득 수 전미 No.1앨범 9 - 영국 6
최장기 No.1에 등록된 아티스트 (80주)
최장기 No.1 앨범 차트에 보낸 아티스트(1956년 최연소 No.1에서 2002년도 'Elvis'까지 최다 히트 싱글 기록(151곡)
빌보드 탑 100에 등록횟수(151번)
레코드 일일 최다판매 아티스트 (엘비스 프레슬리 사망 다음날인 1977년 8월 17일, 2000만 장 판매)
세계에서 가장 팬클럽이 많은 아티스트 (625 팬클럽 활동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방문 된 무덤(사후 1995년 753,965명이 방문)
로큰롤 명예의 전당(1986, 미국, 1회에 등록)
영국음악 명예의 전당 (2004 영국, 1회에 등록)
컨트리음악 명예의 전당(1998, 미국)
복음성가음악 명예의 전당 (2001, 미국)
세계 음악을 바꾼 노래 (That's All Right, 영국 잡지 'Q', 2위는 비틀즈의 'I Wanna Hold Your Hand')
사후 가장 매출이 많은 아티스트(경제 잡지 'Forbes' 매년 약 5,000~6,000만 달러)
제 14회 그래미 어워즈 '평생 공로상' 등 등….

익명의 기부천사


   호놀룰루의 진주만에 있는 '애리조나 기념관'은 엘비스가 1961년에 실시한 자선 쇼로 지어진 것이다. 엘비스는 친구들에게 차와 보석을 자주 선물했다. 하지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단체에 기부도 했다. 대부분 비공식적이거나 익명으로 기부해서 엘비스의 선행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밀리온 셀러 플래티넘 인증 대박, ‘눈물의 기도(Crying in The Chapel)’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트럭 운전사로 생활하던 엘비스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찬양을 주 하나님에게 드리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래가 세상 밖으로 알려지고부터는 '인기'라고 하는 올가미를 헤쳐 나오지 못하고 아쉬운 42세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눈물의 기도(Crying In The Chapel)’는 원래 알티 글렌(Artie Glenn,1915-1994)이 1953년에 고교 재학 중이던 자기 아들 달렐의 녹음을 위해서 만든 노래였다. 이 잔잔한 성가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가 1965년 4월에 취입한 '부활절 특별곡(Easter Special)' 앨범 속에 삽입되었다. 발매되자마자 6주간 빌보드순위 1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그가 데뷔한 지 6년 만에 거둔 대성공이었다. 그 후 1967년에 엘비스 프레슬리 복음성가 앨범 'How Great Thou Art' 속에 보너스 트랙으로도 삽입되었다. 이 ‘눈물의 기도’는 1백만 장 이상이 팔리는 '플래티넘(Platinum)'을 인증받은 곡이기도 하다.

‘로큰롤의 황제’로만 알았던 엘비스 프레슬리가 불렀던 잔잔한 ‘눈물의 기도(Crying In The Chapel)’를 들으며 함께 묵상 속으로 들어가 주님을 만나보자.



엘비스의 도전과 응전


   엘비스가 가난 때문에 흑인 슬럼가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그의 음악은 없었을 것이다. ‘마마보이’로 왕따를 당했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성공이 있었다.
1977년 8월 16일 세상을 떠났으니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살아 있으면 올해 78세이다. 40대 초반에 이 세상을 떠난 짧고 굵었던 그의 생애를 반추해 보며 어린 시절의 불우했던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도전해 진취적으로 응전했던 성공이야기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그를 먼저 불러가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겠지만 크리스천으로서 아쉽게 느끼는 점은 그가 더 장수하여 인생의 후반부에 강한 믿음과 음악적 원숙함으로 대중들에게 기독교 전파에 주력했었으면 하는 점이다.

‘선교의 제왕’을 소망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일생을 되새겨 보며 이제는 ‘로큰롤의 황제’보다 ‘선교의 제왕’으로 기억될 수 있는 위대한 뮤지션이 등장하기를 소망해 본다.
아울러 내일 눈부신 영광이 될 어려운 환경을,
단지 불운과 역경이라고 여기고 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세상만 탓하며 요행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우리 인생의 보좌 위에 주님을 올려드리지 않고 그 자리에 내가 앉아 있지는 않은지?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모이지 않고 세상 속에서 길을 찾고 있는지? 반성하면서 깊어가는 가을밤, 다시 한 번 엘비스의 ‘눈물의 기도’ 가사 한 구절을 음미해 본다.

 

*위 글은 토론토 영락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웹진 "맥닛골 사람들" 2013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