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저널,Korean Journal

사업의 천재 정창헌 한인상공회의소 이사장을 찾아….

kenny Yang 2009. 1. 3. 02:19

월간"코리안저널캐나다 "2009년 1월호에도 동시 게재된 글입니다.

----------------------------------------------------------------------------------------------

 

 

사진:왼쪽 정창헌 이사장,오른쪽 케니 기자

 

 

매출 1억불 달성, 성공스토리의 주인공

시간당 $1.25 받고 눈물젖은 빵을 먹으면서도 꿈을 잃지않던

사업의 천재 정창헌 한인상공회의소 이사장을 찾아….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우울한 소식만 들리는 년말년시이다.

노트북을 열어 인터넷을 접속해도, TV 신문을 봐도 너도나도 국화빵같이 판에박은 불경기, 불황이야기 뿐이다...철옹성같던 미국 자동차 3 풍전등화상태이고 캐나다에  있는 자동차조립과 부품회사들도 도미노 현상으로 속속 공장문을 닫고 있다. 실업률이 사상 최고로 올라가고 있으며 빅쓰리가 문을 닫으면 캐나다에서만 58만명이 직장을 잃을것이란  암울한  뉴스가  인터넷 뉴스보드 상단에 뜨고 있다.

가뜩이나  한미비자면제발효에 따라 캐나다 동포경제가 위축되고 있는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불황이 겹쳐서 직장인들도 조업단축, 감원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비즈니스를 하는 분들도 불경기에 다른 매상감소로 인하여 한인 커뮤니티에도 어느때보다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듯 하다. 부동산 매매도 얼어붙고 투자등 경제 활동도 극도로 약화되어 위기의식이 어느때보다  팽배해 있는  본지 편집진이 장고에 빠져들었다. 과연 누구를 취재하여 한인비즈니스 업계에 희망을 불어 넣을  롤모델로 내세울 것인가?

 

텔레파시가 이런건가 보다.  전날 밤새 서로 숙고하다가 아침 편집회의를 시작 하자마자 발행인과 기자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터져나온 이름,  그래 이사람이야, 정창헌!!”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역경속에서 당당히 사업이란 이렇게 하는거라고 성공신화의 본을 보여 주고있는 사업의 천재, 그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것이다.

 

침체되어가는 동포비즈니스업계에  뭔가 희망을 주는 소식을 전해주자는 이심전심( 캐나다판 창간이래 찰떡 호흡을 맞춰 본지 편집진은 김심양심이라고 해야 맞겠다) 새해 첫지면을 대표할 커버스토리로 정창헌(59) 한인상공회의소 이사장으로 확정하고 발길을 토론토 동쪽 인근도시 피커링으로 돌리게 되었다. 캐나다 동부지역 에서 주류사회와 한인사회를 위하여 다양한 봉사활동과 후원자로 알려진 년매출 1억불 성공신화의 주인공,  이번에 새롭게 재출범한 한인상공회의소 이사장이자  한인 최초로 도요다 딜러 두개를 120명의 종업원들과 함께 모범적으로 운영하여 일취월장 성장하고 있는 정창헌사장의 인생역전 성공스토리를  취재해 본다.

 

 그냥 먼발치서 동포인터넷 사이트나 신문등에서 잠깐씩 스쳐지나가는 뉴스로만 듣고 막연히 한인사회에 봉사와 기부를 가장 많이 하는 독지가 한분으로만 알고있던 이사장.  막상 취재에 들어가 보니 백인시장으로부터 현지 지역발전을 위해서 정치 보라고 주류사회에서 러브콜을 권유받는 타민족에게도 존경받는 사업가 정창헌은 불황의 시대에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할 사업의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근 오샤와 GM자동차공장이 불황으로 한달간 휴업상태여서 그런지 붐비던 하이웨이 401 한산해진듯 토론토 동부 경계선과 맞닿아 있는 피커링까지는 불과 30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언제봐도 정중한 태도와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정창헌 이사장이 김원동 발행인과 함께 그의 사무실을 찾아간 구면의 기자를 반갑게 맞아준다.

 

1966 약관16세인 정창헌 학생은 고국을 떠나 배를타고 농업이민을 떠나는 부모님과 가족들을 따라 홍콩, 동남아, 남아공, 브라질 나라의 항구에 기착하며 두달반동안 항해를 했다. 선상에서 30 가구의 이민 동기생(?) 어른들에게 미리 공부해 두었던 스페인어 강의도 하는   소년 정창헌에겐 나름 재미있었던 추억으로 회상된다.  홍콩에 기착했을때 한개에 $1하던 시계를 $10,000어치나 사서 후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몇배값에 계획을 세울 정도로 사업감각이 있었던 정창헌 소년! 겨우 파라과이에 도착,  이민자의 삶을 시작 하였으나  아무리 60년대 얘기라지만 코브라가 득실거리는 밀림속에서 농사를 지으라니?  이민을 알선 했던 당시 한국정부나  초청한 파라과이 정부나 한심했던건 피장파장이 었던듯 하다.   결국 불가능한 농사는 때려 치우고 시장에 가서 형들과 함께 홍콩에서 사왔던 시계를 가가호호 방문 판매 하였다.  현지인들이 문을닫아 걸며 천대할때  한참 사춘기 학생이었던 그는 눈물어린 빵을 먹으며 좌절하지 않고 오뚜기처럼 꿈을 안고 다시 뛰었다.  여러가지  쓰라 렸던 경험과  어느날 시골 아줌마가 팔찌를 사주며 격려할땐 다른 눈물을 흘리며 “Yes I Can !” 하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힘을 얻었다.

취재 중간 중간에 기자가 가졌던 의문이 저절로 풀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머리속에 정리되어지는단순한 결론, 성공요인을 생각해 보니 핵심은 이러한 특유의 포기하지않고 좌절하지않는 도전정신이 오늘의 그를 만들어 영양분이 되었고 사업가로 대성하기 위한 원천이 아니었을까?

 

 

그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거쳐 캐나다에 정착하여 현재120명의 종업원들과 함께 두개의 도요다딜러샵을 운용하고 있으며 매출  1억불을 올리고 있다.  년간 수천대의 자동차를 캐내디언들과 한인들에게 판매하는 사업가로 우뚝선 자랑스런 의지의 한국인이다.

 

아르헨티나에서 패밀리비즈니스로 10,000스퀘어 피트정도의 그로서리 스토어를 운영할때도 18세의 그는 새벽 3시에 기상하여 도매상에서 장을 보며 너댓개의 무거운 박스를 매고 뛰면서 트럭에 싣는등 힘든일을 도맡아 했었다고 한다.

고교졸업후 21세때 아버지께 비교적 한인이 많다고 막연히 듣고있던 토론토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어렵게 허락을 맡아 1971 3 어느날 늦겨울의 폭설속에 아무도 아는이 없는 토론토 피어슨국제 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값을 내고 수중에는 남은 200달러가 전재산이었다.  고맙게도 후일 목사가   크리스쳔 동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직업을 갖기위해 이곳저곳을 방문하며 헤매었다.  그나마 조금 가진돈이 거의 떨어지자 추운 겨울에 마지막 남은 돈으로 25달러짜리 중고잠바 하나 사서 입고 지하철요금을 아끼기위해 걸어다니며 이곳 저곳 문을 두드렸다. “ 이대로 죽을 없다  포기하지 않고직업을 구하던 어느독일인이 운영하는 바디샵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때 용접할줄 아느냐?’ 묻길래 이민을 준비하며 한국에서 6개월 학원에서 배워 경험이 있던 청년 정창헌은 “Yes, I can ”대답하고 서투른 용접공으로 토론토에서 직업을 갖게 된다.

 

당시 최저임금에도 미치는 시급 $ 1.25 저임금에도 빵값 해결만도 감사하며 언젠가 오너가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내일처럼 열심히 일했다.  동료캐내디언 직원들은 점심때 편하게 배달되는 샌드위치와 콜라를 먹고 마셨지만  절약해야만 했던 청년 정씨는 하숙집에서 날짜 지난 값싼 식빵에 치즈만 넣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수돗물로 음료수를 대신해 가며 힘든일을 했었다고 한다.  한쪽 구석에서 눈물 흘리 면서도 스스로에게  다짐, 다짐하며 성공에 대한 집념을 남몰래 키워갔다. 점차 기술도 늘고 주인보다 일찍 출근하여 악착같이 일하던 그가 나은 곳으로 가려하자,  사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간당 $6 제시하며 그를 붙잡았다. 

 

형편이 나아지자 그동안 접어두었던 향학열이 다시 솟아나 주경 야독으로 12학년과 13학년을 마치고 라이어슨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차체메카닉 자격도 따고 조그만 한인경영 바디샵으로 옮겨 일하다 매출이 저조한 사업체를 지독하게(?) 모은 단돈  오백불로 인수하여 초라하게 작은 규모지만 그가 소원했던 대로 자기사업을 시작하기에 이르른다.  사장은 특유의친화력과 성실성 그리고 남미에서의 어려웠던  세일즈 경험을 바탕으로 실전감각을 동원하여 딜러를 상대로 마켓팅에 주력하였다. 한번에 성사될리가  있었겠는가? 처음 모르는 동양 인이 일감을 달라고 하자 쳐다보지도 않던 거래선에 커피와 도넛 사가지고  반복해서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해 나갔다.  여러차례 찾아가 낯이 익자 쉽게 고치기 어려울 정도의  폐차직전의 중고차를 주면서 고쳐보라고   오더를 주더니 밤을 세워 반짝반짝 하게 만들어 다음날 아침에 갖다주자 “ Miracle ! ” 하고 깜짝 놀라며 그제서야 오더를 주기 시작했다.

저렴한 값으로 좋은 품질의 서비스를 신속하게 제공해 나가자 주로 백인들이 운영하는 딜러들과 중고차판매회사들에 소문이 나서 순식간에 사업은 확장되어 나갔다.  

 

그러나  당시 워낙 저렴하게 해주다 보니 순익은 적었다고

 더구나 골목길의 협소한 장소에서 운영을 하다 보니 성장에 한계를 느껴 본격적으로 미시사가 자리를 넓게 잡고 경찰지정 사고차량 전문 바디 샵을 시작했다.  사고차를 몰고가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본넷트가 열려 위험했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으나 6개월 후에는 단가도 올리고 순익도 늘어났다. 인근에 땅과 건물도 사고 한국어방송에서 피천득씨 아들 피세영씨와 함께 근무하던   미인성우 강종희씨를 만나 한인사회 광고건을 의뢰하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져 결혼까지 골인 하게 된다.

어느 가을날 정사장 부부가 토론토 교외를 드라이브 하다가  멋있는 캐내디언집을 보고 무조건 들어가서 주인에게 아름다운 집이다 !” 얘기하니 백인부부가 한잔 하자고 붙잡아서 고객이자 친구가 되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종업원이 70명으로 늘어나고 24시간 경찰견인업소로 운영하여 수익을 많이 내자 아파트 빌딩과 주상복합빌딩을 사두었었다. 새로운 호텔비즈니스를 하기위해 그동안 키워왔던 대형 차량수리업소를 중국계 캐내디언에게 1983 매각하였다.

 

몇군데 접촉중 온타리오호숫가에 자리잡은 전망좋은곳에 155 객실의 온더레이크 호텔”(INN on THE LAKE) 인수하였다. 4층의 호텔은 당시 유태인이 운영하고 있었으며 그는 새로이 라이어슨대학에서 비즈니스를 공부하며 유명한 포시즌호텔체인 본사에서 컨설탄트를 간부로 채용하여 경영수업도 받았었다고 한다.

 

미국 마이애미에서 년중행사로 열리고 있던 미스유니버스대회를 보면서 그는 6 연속 대회 개최장소인 40 전통의 유명한 SHELBORNE  BEACH  HOTEL 점찍어 두었다가 결국 1993 인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255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던 마이애미의 최특급 호텔과  캐나다의 호텔까지 두개의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많은 수익을 내고 있었지만  사업가 정창헌의 마음속엔 항상 과거 바디샵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면서 고객들이었던 자동차딜러의 사업적인 매력이 오르곤 하였다. 당시 눈코뜰 없이 바쁜 와중에도 고객의 동향을 연구하다 보니 스스로 자동차판매를 있다는 자신감, 부서진 차를 수리하는것 보다 신차를 고객에게 판매하여 수익을 창출하고 고객만족을 주는 사업이 그렇게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항상 마음 한켠에 품질좋은 Brand  New 카를 판매하는 딜러를 경영하고 싶었던 그는 1988 지인의 소개로 지역책임자를 만나서 사업계획을 설명하자 캐내디언이 보았는지 최초로 한인에게 파격적으로 피커링과 딕시 두개의 딜러쉽을 동시에 승인해 주었다. 지역사회와의 유대 관계를 중시하는 그의 더불어 살기철학과 남다른 경영으로 1995년에 캐나다 280 딜러중 최우수상, 2007년에 15,011 판매달성, 그리고 2008 1월에 제조국인 일본을 제외한 전세계 도요다매장 중에서 최고의 판매수준 200,000점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볼톤의 기존 Glen Eagle  골프장옆에 신규로 아름다운18홀과 80채의 고급 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한것도 이즈음이다.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 호텔 2개와 자동차 딜러사업에 골프장 건설까지왕성한 사업의 천재 정창헌도 그러나  1990년초 예상치 못한 북미주 전역에 불어닥친 불황에는 어쩔 없었다.  골프장건설을 중단하고 호텔 고객점유율이 75%에서 30% 내려가는 시점에 정사장도 버틸 재간이 있었겠는가?

호텔 두개도 모두 은행으로 넘어가고 가지고 있던 부동산을 반값으로 처분하여 겨우 피커링 도요다 하나만을 남겨놓았다.  때가 사업가로서의 그에게 최악의 시련이었다.  그러나 불면의 밤을 지새우면서도 인내와 기도로서 천주교 신자 정창헌은 하나님께  매달 밖에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새출발 하겠다고 기도하고 있던차에1993 마이애미 호텔에서 30 거리인 쿠바에 허리케인 앤드류가  휩쓸어 재건이 시급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스패니쉬,영어,한국어등 3개국어를 있는 그는 스패니쉬 경제권인 쿠바로 날아가서 12명의 종업원으로 자동차를 판매하며 중고차도 취급하는 딜러를 오픈했다. 어렵고 불쌍한 그들에게 중고차를 팔고도 수금이 안되는 상황에서 보통 사람 같으면 철수해 버리겠지만 기도하는 정창헌사장에게 보이지 않는 이끌림이 있었다. “ 도와 주라하시는 구제사역의 도전을 받은 것이다.  한민족의 핏줄을 이어가는 멕시코 애니깽 후예들이 쿠바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민 3세와 4세까지 찾아 다녔다. 개인재산을 카스트로정권에 뺏기고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가난과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 우선 시급한 옷가지를 지원하기로 하고 토론토로 돌아왔다.  1998 구세군을 통하여 중고의류를 수거하여 20 콘테이너를 보냈는데 어려운 한국인 후예들에게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었지만 공산당치하에서 안된다,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 해서 약속한 분들에게 지원이 안되어 안타까웠다.

캐톨릭 신부, 주교들과 함께 정치범 수용소를 방문하여 직접 사랑의 선물을 나눠주고 아이들과 같이 공을 차며 어려운 환경속에서 살아 가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구제사역을 하며 사랑을 전하는 보람도 느껴보았다고….

 

20 이상 도요다 자동차판매회사를 운영하면서 2008 1 캐나다 전국은 물론 일본을 제외한 전세계에서 200,000 판매수준 달성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최초의 딜러가 되었다.  또한 취재 표창을 많이 받았다는데 자료가 없느냐고 재촉하자, 벽에 걸어 놓을만도 하건만 굳이 책상속에 그냥 넣어둔 앨범을 겨우 찾아 수줍게 꺼내놓는 겸손함 보며 기자는 잠시 편안하고 온화한 느낌의 인간 정창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멜라스트먼 토론토 시장, 피커링 소방국, 구세군, 듀람교육청 , 한국노인회 워커톤 , “유나이티드웨이,  주의회의원(결손가정어린이 크리스마티 파티주최), 푸드뱅크 , 피커링 야구협회등 으로부터 수많은 감사장을 보며 바쁜 비즈니스를 경영하면서 언제 주류사회 각계각층에 온정의 손길을 베풀었는지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인터뷰하면서 완벽한 한국말을 구사하여 전혀 불편함을 못느꼈었는데도 한국을 떠난지 오래되어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겸손해 하는 그에게 한국,남미,북미에서 사업을 경영하며 살아왔던 그에게 3개국어를 구사할 있다는건 오히려  사업경영에 장점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니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이사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경영수업을 받으며 그를 돕고 있는 아들과  어린딸을 각각  두고있는  가장이며 평화마라톤, 워커톤 한인사회 봉사에도 앞장 서고 있으며 현재 2008년에 새로 개편된 한인상공회의소 이사장을 맡아 한인사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명예욕은 없으며 비즈니스에 더욱 정진하여 자동차딜러경영을 열두개정도로 늘려 경영해 보는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계획을 묻자 그는 한국자동차도 품질이 좋아졌으므로 20 이상의 성공적인 딜러 경영을 바탕으로 이젠 우리 한국차로 목표를 달성하기를 원하며 나아가 워렌 버핏처럼 자선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환원과 불우이웃 돕는일에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음 취재원과의 약속으로 취재를 서둘러 마치고  하이웨이를 달리며 모처럼 사업이란? 비즈니스란 무엇이고 어떻게 경영하여 성공에 이르는것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느 MBA대학원 경영학강좌보다 값진 정창헌 천재교수(?)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성공학 강의를 반추해 보면서 오늘 이시간 비즈니스가 어렵다고 자포자기하는 동포들이 있다면 그의 사업경영 스토리를 다시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Kenny Yang,  wildinwin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