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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맥닛골에 흐르는 해란강-- 조선족 송철수 박사 이야기--

kenny Yang 2013. 5. 7. 14:58

 

               중국 연변자치구의 용정시에 가면 고 윤동주 시인 생가옆에 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실 칠판에 당시 학생들이 쓴 글을 보면 자연스레 어린시절 우리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설사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지 않았지만 독립투쟁의 중심이었던 이 곳 지명만

               들어도 왠지 숙연해지고 뭉클하게 와 닿는 그 무엇이 있다.

 

 1927년 봄 3학년1반 학교종이 땡땡땡!
- 금주에 할일 : 손발을 깨끗이 씻자!
- 청소당번 : 문익환(1918.06.01~1994.01.18)
- 지각생 : 윤동주(1917.12.30~1945.02.16)
(일본 규슈 후꾸오카 형무소 수감 사망)
- 떠드는 학생 : 송몽규(1917.09.29~1945.04.18) (일제 생체실험대상으로 사망)
- 구구단 못외우는 학생 : 김옥분

 

 

용정,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항일애국 지사들을 양성한 민족교육의 중심지인 이곳에 당시 독립투쟁의 뜻을 품고 윤동주, 문익환, 이상설 등 수 많은 애국의 피가 끓는 젊은이들이 조선반도에서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송철수’, 그의 부친도 독립군 부대소속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위해 싸웠다. 어린 철수는 가족과 떨어져 밤에는 싸우고 낮엔 산속에 숨어 지내야만 했던 부친이 그 땐 참으로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독립투사로서 존경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선진 G20의 일원이 된 ‘대한민국’과 한국인들은 이들 조선족 후예들에게 단단히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요즘엔 캐나다의 바쁜 이민생활속에서 '민족', ’한핏줄’같은 단어가 어느덧 그리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연변자치구 연길태생인 그를 만나 인생이야기를 듣다보니 '한민족 디아스포라'에 대해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 보게 됐다. 주일마다 친교실에서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의 그와 커피 한잔의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의 고향 연변에 있는 ‘천년두고 흐르는 한줄기 해란강’이 연상되곤 했다.

그의 조부께서 1920년대초 6살된 부친을 데리고 함경도 청진에서 중국 연길로 건너갔고 송철수는 거기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연변대학과 대학원에서 의학을 전공 후 교수로 재직중 미국교환교수로 건너 가 5년여 임기를 마치고 캐나다로 이민왔다.

 

 

비록 의대교수 출신의 엘리트지만 미국과 캐나다에 와서 만나는 한인 대부분은 그가 조선족 출신임을 알면서부터 차별을 해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일부 한인들에게 ‘조선족’이라고 따돌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립투사인 부친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그는 좌절하거나 그들과 직접 부딪히기 보다는 그 때마다 인내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극복해 나갔다.

 


 

이곳 캐나다에도 연변 등 중국에서 이민와 살고있는 조선족 인구가 만 오천명 정도이며 절반에 가까운 7천여명이 광역 토론토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그들도 같은 한핏줄을 나눈 형제자매로서 '우리는 하나'이기에 서로 만나야 하고 허심탄회한 대화와 진정한 교류도 있어야 한다.

 

 

중국커뮤니티와 한인사회 어느쪽에도 환영받지 못한다면 외톨이가 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들 중 일부는 중국커뮤니티에, 일부는 한인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양쪽 커뮤니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정체성의 방황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는 캐나다 거주 조선족 동포들 중에 물류, 장식, 복장, 무역, 의료, 금융, 재무회계, 음식업 등 각계 엘리트들이 많다며 일부 한인들이 아직도 조선족 동포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며 안타까워 한다.

사실 재작년 랍 포드 토론토 시장 취임식에서 노래를 불렀던 가수가 조선족이었고 캐나다올림픽 대표선수 중에도 조선족 출신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족들은 민족적 동일성을 향한 욕망이 클수록 한국이나 한국인들에게서 더 많은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자신들을 '형제자매'로 바라봐 주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다. 한국인들이 코리언 디아스포라 가운데서 특히 재중동포와 조선족 출신을 차별대우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어 부끄럽기까지 하다.

 

 

오늘날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제대로 수용하고 있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조선인의 역사를 자기네 소수민족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소위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을 탓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와 뿌리가 같은 조선족들은 한국 문화와 사회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또 잘 알고 있다. 오히려 한인들이 그들과 힘을 합쳐 인구가 많은 중국인커뮤니티에 비지니스는 물론 다방면으로 진출해 서로 윈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개인의 이익만 구하기보다는 타인을 위해 일하는 마음이 앞서는 그는 정체성을 못찾고 한-중 양쪽 커뮤니티 어느쪽에도 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겪고 있는 조선족 공동체를 위하여 발벗고 나셨다. 지난 2005년 5월 최초로 발기인 몇명과 함께 '캐나다조선족협회(KCAC)'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서 6년간 봉사하며 회원수 2천여명으로 발전시킨 업적을 남긴 ‘선구자’이다.

 

그는 현재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 전세계 27개국에 진출해 있는 미국계 대기업 “아이덱스 캐나다(Idexx Canada)”사에 근무하고 있다. 캐나다 의약품 독성검사를 실시하고 있는 이 회사에서 그는 토론토 지역 실험실 책임자로 국민건강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동안 의약품 검사업무를 통해 '육적 건강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는 그는 이제 크리스천으로서, 아직 믿음없이 방황하고있는 캐나다 조선족 이민자들의 ‘영적건강지킴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뉴욕처럼 조선족 자체교회가 이곳 토론토에도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다.


송박사 스스로도 고백하듯이 대부분의 중국 조선족출신 이민1세들은 반세기 넘게 공산당의 핍박과 문화대혁명으로 교회가 폐쇄되는 등 무신론 교육 속에 자라 기독교에 회의적이며 비협조적이다. 그만큼 복음전파가 어렵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도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와 계획이 없었다면 아직도 불신의 늪에서 헤메고 있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초등학교 시절엔 그나마 연길에 교회가 있었는 데 1966년 문화혁명 이후 중국정부에서 교회건물을 다 허물고 없애 버렸다고 한다.


 

연변에서 성장, 순탄하게 의대와 대학원을 마치고 모교인 연변의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1991년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소재 하워드대학에 교환교수로 초청받아 건너가게 된 것이다. 경비일체를 미국측에서 부담하니 중국정부 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불신자였던 그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으신 길이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국선교사역을 추진하던 ‘미국한인의사협회’ 의 크리스천 회원들이 역점을 뒀던 사역의 일환이었다.

 

 

오클라호마에서 대학교수로 근무하던 워싱톤 제일침례교회의 ‘이희민’ 장로를 주축으로 외과의사인 조 박사 등이 나서서 성사됐다. 난생 처음 미국땅에 도착, 미국식품의약청( FDA)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러 온 그에게 부임 첫 주일부터 안 가겠다는 그를 그분들은 반강제로(?) 교회로 인도했다.


 

그는 처음 교회에 따라가서 예배를 드릴 때 “이 사람들, 정말 제정신인가? “ 하며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치하에서 평생 종교없이 자란 그가 30대 후반에 들어서 난생 처음 본 예배 모습은 황당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교환교수 임기를 두번 연장할 수 있어 워싱턴 DC의 한인교회에서 새생명, 새가족반 등등 교육을 받으며 점차 믿음생활에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미국 체류 마지막 해, 중국 귀국을 앞두고 그는 한의사로 일하던 아내, 그리고 아들 '휘'와 함께 향후 진로에 대해 하나님께 매달렸다.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은 다시 그들에게 캐나다로의 비젼을 심어 주셨다. 마침 의료전문인력이 부족하던 캐나다 정부에서 이미 미국의료연구 경험을 5년이나 쌓은 그에게 단 3개월만에 영주권을 내 준 것이다.

 

 

그러나 막상 토론토에 도착해 보니 캐나다 경력이 없는 그에게 실제 의사로서의 일할 기회가 당장 주어지지 않았다. 민간업체의 취업도 만만찮은 험로였다.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릴 수밖에……


 

하나님은 이번에도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이미 알고 계셨다.


 

얼마 후 미국의 이희민 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인중 한분이 토론토에서 정부일을 맡아 의약품 독성검사를 하는 회사에 있으니 추천서 가지고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고비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체험한 그는 이렇게 ‘뉴크로 테크닉’실험실 검사원(Lab Technician)으로 캐나다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근처 한인교회에서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믿음생활을 하다 맥닛골로 왔다. 영락의 가족이 된 그는 ‘부부성장학교’를 통해 아내와 더욱 정이 깊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몇 년전 한의사였던 아내 전춘련씨가 암으로 투병하다 먼저 하늘나라로 갔던 것이다. 많은 영락의 형제자매들이 발벗고 나서 도와 줘 너무 고마운 나머지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재작년 참여한 ‘알파코스'는 배우자를 잃고 흔들리던 그의 마음을 믿음으로 다 잡는데 큰 도움이 되고 성경말씀에 대해 아직 남아았던 몇가지 의문이 해결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현재 약 10%에 불과한 캐나다 조선족의 크리스천 비율은 중국 연변자치구의 6%보다는 약간 높지만 60-70%에 이르는 캐나다한인 이민자들의 비율로 보면 추수할 일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캐나다조선족들이 먼저 복음화 되면 그들이 나서서 중국내 200만 조선족은 물론 언어와 정서가 통하는 13억 중국인과, 독재에 시달리는 북한인들에게까지 복음을 보다 지혜롭게 전파할 수 있을것이다.



캐나다 조선족협회의 산파역인 그는 이번에 새로운 조선족 반려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앞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길을 예비해 놓으셨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한민족의 핏줄을 이어받은 중국내 2백만 조선족은 북한, 특히 개방 후 북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다. 그 뿐인가, 13억 중국 인구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선교의 잠재 역군이다. 이런 점에서도 조선족 선교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조선족 선교는 오늘날 세계선교사 파견 2위국가로 부흥한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중국의 조선족들이 민족의 정체성과 우리 언어를 유지하며 오늘까지 그 땅에 뿌리내리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조선족 선교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북한과 중국의 복음화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를 하나님이 특별히 북미주로 불러내 인도하고 계시는 큰 뜻이 아닐까? 


송박사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키우던 '캐나다조선족협회' 회장직을 재작년 이민 3세 후배에게 물려주고 이제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30여년 역사의 비영리 봉사단체 '홍푹정신건강협회(Hong Fook Mental Health Association)'에서 의사로서 광역토론토 지역의 한국, 중국, 조선족, 홍콩, 캄보디아, 베트남 계등 소수민족들의 정신건강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선택으로 흩어져 살다가 이렇게 토론토에서 만난 조선족 캐네디언 송철수 형제! 다시금 한핏줄이라는 뿌리를 확인하며 그와 주님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진정한 맥닛골 가족임이 자랑스럽다.

 

 

글: 양경춘 편집위원

 

*본 글은 캐나다 토론토 영락교회에서 매월 발행하는 웹메거진 2013년 5월호 "맥닛골 사람들"에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